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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하블리첵, 역대 최고의 식스맨이 일궈낸 보스턴 왕조

존 하블리첵, 역대 최고의 식스맨이 일궈낸 보스턴 왕조

2024.02.23

2024.02.23


 

'위대한 농구선수 75인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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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Editor : MANIA, 허슬플레이어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을 쏟아부은 사람을 '장인'이라고 부릅니다. NBA 팬으로 살아온 20년. 숙련된 NBA 장인의 눈으로 NBA 역사에 숨겨진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 해당 콘텐츠는 
Eland Museum의 특별한 소장품으로 MANIA와 함께 제작하는 기획 콘텐츠 입니다.

 

농구에서 식스맨(Sixth man)이란 선발로 출전하지는 않지만 선발 선수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벤치 선수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농구에서는 가장 뛰어난 5명의 선수가 선발을 맡곤 하지만, 식스맨은 그 5명에게 뒤쳐질 게 없는 제 6번째 선수이다.


※ NBA 75주년 기념 존 하블리첵 소개 영상 (출처: NBA)

식스맨은 보통 벤치 선수 중에 자연히 두각을 보이는 선수를 칭하지만, 때로는 일부러 주전급 선수를 벤치에서 출전시키는 의도적인 식스맨 전략도 있다. NBA에서 이 식스맨 전략을 최초로 활용한 감독이 바로 보스턴 셀틱스 왕조를 탄생시킨 명장 레드 아워백이다.

보스턴 시절 아워백이 최초로 낙점한 식스맨은 바로 프랭크 램지이다. 그는 탁월한 득점력을 지닌 스윙맨이었는데, 이미 팀에는 올스타 슈팅가드 빌 샤먼이 있었기에 그는 선발 스몰포워드를 맡는 것이 적당했다. 하지만 아워백은 오히려 램지를 벤치로 내리고, 대신 수비와 허슬에 특화된 존 로스커토프를 선발로 기용했다. 농구는 5명이 함께 뛰지만 공은 하나이므로, 득점력이 좋은 램지 대신 가자미 스타일의 로스커토프를 선발로 쓰고, 램지에게는 벤치 구간의 득점을 주도하게 한 것이다. 이 식스맨 전략은 5~60년대 보스턴이 최강팀으로 군림하며 11번의 우승을 차지할 수 있게 한 원동력 중 하나였다.

 

 

※ 보스턴 왕조를 이끈 명장 레드 아워백 감독
벤치에서 피우던 시가 담배는 그의 시그니쳐이기도 했다.

램지가 어느덧 서른 살이 넘어가자, (과거에는 선수가 서른 살만 넘어도 은퇴 시기가 다가왔다고 할 정도로 선수 수명이 짧았다.) 아워백은 램지를 대체할 새로운 식스맨을 물색했다. 그리고 때마침 오하이오 주립대를 갓 졸업한 신인 선수가 아워백의 눈에 띄었다. 바로 보스턴 8번의 우승을 만들어 낸 존 하블리첵이었다.




※ 식스맨 시절의 존 하블리첵

존 하블리첵은 드래프트 당시 탑 티어 유망주는 아니었다. 오하이오 주립대가 1960년에 우승할 때 멤버이기도 했지만, 당시 스포트라이트는 대학 최고의 선수인 팀 동료 제리 루카스에게 쏠려 있었다. 당시 NBA에는 9개 팀이 있었는데, 앞선 8개 팀은 모두 하블리첵을 지나쳤고, 1라운드 마지막 픽을 쥐고 있던 보스턴 순번에서야 겨우 지명을 받았다. 당시 그의 재능은 과소평가되고 있었으나, 선수 보는 눈이 탁월했던 아워백의 혜안은 그를 놓치지 않았다.


 

※ 대학 선수 시절 스포츠 전문 잡지 'Sports Illustrated' 포스터를 장식한 제리 루카스

 

램지 때의 식스맨 전략과 마찬가지로, 아워백은 전문 수비수 토마스 샌더스를 주전 스몰포워드로 내세우고 하블리첵을 대신 식스맨으로 기용했다. 하블리첵은 매치-업 상대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끈질긴 수비력을 자랑했기에, 보스턴은 샌더스와 하블리첵을 번갈아 기용하며 상대 에이스 스윙맨을 48분 내내 괴롭힐 수 있었다. 하블리첵은 수비뿐만 아니라 득점력도 탁월했기에 1옵션 샘 존스에 이은 2옵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해냈다. 또한 웬만한 포인트가드 못지않게 볼을 잘 다뤘고 패싱 센스도 갖췄기에 코트 위에서 못 하는 게 없는 팔방미인이었다. 

최강팀 보스턴의 일원으로 데뷔한 덕에, 하블리첵은 데뷔 이래 4년 연속 우승(63년, 64년, 65년, 66년)을 맛보았다. 식스맨으로 선발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당히 우승의 주역으로 인정받았다. 65년 동부 디비전 파이널 7차전에서는 경기 종료를 앞두고 극적인 스틸을 하며 팀 승리를 지켰는데, 이때 보스턴의 전설적인 아나운서 조니 모스트가 외친 “Havlicek stole the ball!”은 농구 역사에 길이 남을 명 멘트로 남았다. L.A 레이커스와 맞붙은 66년 파이널에서는 엘진 베일러를 전담 마크하면서 평균 23.3득점, 10리바운드를 기록했고, 보스턴은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 NBA 역사상 최고의 순간 중 하나
존 하블리첵의 65년 파이널 7차전 극적인 스틸 장면 (출처: NBA)

이듬해인 67년 플레이오프에서 보스턴은 윌트 체임벌린이 이끈 라이벌 필라델피아 76ers에게 동부 디비전 파이널에서 일격을 당해 연속 우승 행진을 “8”에서 마감해야 했다. 절치부심한 보스턴은 68 플레이오프에서 필라델피아를 상대로 리벤지에 성공한 뒤, 파이널에 진출해 L.A 레이커스와 다시 맞붙었다.

하블리첵은 이제 식스맨의 수준을 넘어서, 어느새 팀의 확고한 1옵션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파이널에서 식스맨이 아닌 주전으로 풀 출장하며 평균 27.3득점, 8.7리바운드, 6.7어시스트를 기록,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 당시 파이널 MVP급의 활약이었으나, 아쉽게도 당시는 아직 파이널 MVP 상이 없었다.

68-69시즌의 보스턴은 빌 러셀, 샘 존스 등 주축들의 노쇠화로 정규 시즌 동부 4위에 그치며 이젠 한 물 갔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선배들은 늙었을지 몰라도 하블리첵은 이제 막 전성기에 들어선 시점이었다. 레이커스와 다시 맞붙은 파이널*에서 두 팀은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벌였고, 하블리첵과 러셀은 단 1분도 코트에서 쉬지 않은 채 풀-타임을 뛰었다. 결국 시리즈 평균 28.3득점 11리바운드를 기록한 하블리첵의 활약으로 보스턴은 통산 11번째 우승을 해냈다.

* 이 파이널 때 처음 파이널 MVP가 생겼으나, 애초에 이 상은 준우승팀에서 분전한 제리 웨스트의 활약을 기리기 위해 수여한 것이었기에 웨스트가 초대 수상자가 되었다.



 

※ 팀의 주장으로서 69년 우승 트로피를 대표로 수상한 하블리첵. 우측은 당시 NBA 총재 월터 케네디이다.

 

이 우승을 끝으로 러셀과 존스는 은퇴하고, 보스턴 왕조의 영광도 막을 내렸다. 하지만 하블리첵에게는 끝이 아닌 새로운 출발의 장이었다. 69-70시즌 이후 하블리첵은 플레이오프 뿐만 아니라 정규 시즌에도 풀-타임 주전으로 뛰면서 지난 7년간 짊어졌던 “식스맨” 역할을 내려놓았다.

은퇴한 선배들의 공백은 꽤나 컸고, 보스턴은 2년 연속 플레이오프 탈락의 수모를 맛봐야 했다. 하지만 그 빈자리를 어느새 데이브 코웬스, 조 조 화이트 등 젊은 후배들이 채워가면서 70년대 보스턴은 과거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도약을 준비할 수 있었다.

72-73시즌에 보스턴은 무려 68승 14패로 8할이 넘는 승률(82.9%)을 기록했는데, 이는 과거 왕조 시절에도 기록하지 못한 성적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73 플레이오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하블리첵이 불의의 어깨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뉴욕 닉스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하블리첵은 어깨가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도 식스맨 출전을 자원하며 투혼을 불살랐으나 역부족이었다.

절치부심한 보스턴은 이듬해인 73-74시즌에는 끝끝내 파이널에 진출하며 왕조 시절 이후 5년 만에 결승 무대를 밟았다. 상대는 카림 압둘-자바가 이끄는 71년 우승팀 밀워키 벅스였다. 어느덧 팀의 최고참으로서 왕조 재건의 중책을 떠맡은 “에이스” 하블리첵은 파이널 평균 26.4득점, 7.7리바운드, 4.7어시스트를 올리며 7차전까지 가는 혈전에 종지부를 찍었고, 파이널 MVP의 영광도 차지했다.  

이로 인해 카림은 NBA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플레이오프 탈락 팀 출신의 시즌 MVP가 되었다. 아울러 70년대 명실상부한 ‘패왕’으로서 그 명예를 회복한 순간이기도 했다.



 

※ 70년대 보스턴을 이끈 주역들. 좌측부터 하블리첵, 데이브 코웬스, 조조 화이트.
그 앞은 보스턴의 단장 레드 아워백이다(출처 : bostoncelticshistory.com)

 

이후 하블리첵은 30대 중반에 접어들며 완연한 노쇠화를 보였고, 에이스 자리도 후배 코웬스에게 물려줬다. 그리고 보스턴이 76년에 다시금 우승을 차지함에 따라 하블리첵은 개인 통산 8번째 우승을 달성했다. 이제 더 이상 우승의 주역은 아니었지만, 그는 팀의 정신적인 지주로서 후배들과 함께 영광을 누렸다.

하블리첵은 2년 뒤인 77-78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그의 16시즌, 1270경기 출전은 그 당시만 해도 역대 최고 기록이었다. 커리어의 절반은 리그 최고의 식스맨으로, 나머지 절반은 당당한 팀의 에이스로서 파란만장한 커리어를 보낸 그는 지치지 않는 끈기와 열정의 화신이었다. 


 


 

※ 그의 결정적인 스틸 장면 50주년을 기념해 보스턴 구장에 등장한 존 하블리첵 (출처 : 보스턴 해럴드)

 


 

※ 하블리첵이 70년대 후반에 착용한 홈경기 저지 (이랜드뮤지엄 소장)
그의 등번호 17번은 보스턴에서 영구 결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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